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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위한/책장 넘어가는 소리

이외수 - 하악하악

하악하악: 이외수의 생존법
카테고리 시/에세이
지은이 이외수 (해냄출판사,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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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다. 비냄새가 섞여 있다. 나무들이 머리카락을 산발한 채 몸살을 앓고 있다. 세상은 오래전에 타락해 버렸고 낭만이 죽었다는 소문이 전염병처럼 떠돌고 있다. 그래도 지구는 아직 멸망하지 않았다. 나는 오늘도 집필실에 틀어박혀 진부한 그리움을 한아름 부둥켜안은 채 그대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p13)


24
그리움은 과거라는 시간의 나무에서 흩날리는 낙엽이고 기다림은 미래라는 시간의 나무에서 흔들리는 꽃잎이다. 멀어질수록 선명한 아픔으로 새겨지는 젊은 날의 문신들.
(p34)


62
포기하지 말라. 절망의 이빨에 심장을 물어뜯겨본 자만이 희망을 사냥할 자격이 있다.
(p73)

 
115
시간이 지나면 부패되는 음식이 있고 시간이 지나면 발효되는 음식이 있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시간이 지나면 부패되는 인간이 있고 시간이 지나면 발효되는 인간이 있다. 한국 사람들은 부패된 상태를 썩었다고 말하고 발효된 상태를 익었다고 말한다. 신중하라. 그대를 썩게 만드는 일도 그대의 선택에 달려 있고 그대를 익게 만드는 일도 그대의 선택에 달려 있다.
(p122)

 
190
낙엽에 쓰는 일기 이별해 본적이 없는 이의 가슴에도 서늘한 이별의 아픔이 고이는 계절ㅡ가을.
(p189)


204
이토록 하늘 청명한 가을에는 티끌만 한 미움조차 가슴에 남겨두기 죄스럽지요. 하지만 아픈 기억의 편린일수록 더욱 선명한 빛깔의 단풍으로 물들지 않던가요. 해마다 가을이면 그대 발밑에 각혈 같은 빛깔로 흩어지는 단풍잎들, 그대에 대한 제 미움은 아직 그대로 선명합니다.
(p200)
 

208
토끼와 거북이를 육지에서 한 번만 경주를 시키고 토끼를 자만과 태만을 상징하는 동물로 간주하거나 거북이를 근면과 겸손을 상징하는 동물로 간주하면 안 된다. 바다에서 경주를 시키면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올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인간들이 어떤 대상의 가치를 판단하는 방식은 거의가 이런 모순을 간직하고 있다. 세상이 그대를 과소평가하더라도 절망하지 말라. 그대는 누가 뭐라고 해도 우주 유일의 존재다.
(p207)